kobe


                                           

Dance Box, Kobe


1996년에 오사카에서 처음 문을 연 현대무용 전문 소극장으로 연간 50편 이상의 현대무용 작품을 기획, 제작했다. 2009년 만화영화 철인18호의 발상지, 고베시 신나가타구(新長田区)로 이전, 현대무용을 축으로 새로운 활동을 확장하고 있다.
리서치
︎대도시인 오사카에 극장이 있을 때는 공연을 올리면 관객이 저절로 모였지만, 지금의 신나가타구로 극장을 옮긴 후에는 우리가 관객을 찾아야 했다. 그간 해왔던 여러 협력을 누구와 같이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있었다. 그래서 ‘지역’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3년에 걸쳐 지역과 지역의 사람들과 네트워크를 만드는 일을 했다. 고베 안에서도 신나가타는 서민 주거지역으로 재일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며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들이 지역의 큰 축이자 특성이라면 이들과 연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사카에 있을 때부터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장애인과도 계속적으로 연계하기 위해 지역에 있는 장애와 관련된 자원들을 파악하고 네트워크를 일궜다. 극장이 소재한 신나가타 상점가 내에 있는 특수학교인 에코르 고베, 장애인작업장, 장애인과 노인들의 돌봄센터 등과 연계하고 있다.

그리고, 고베 지역에는 무용의 전문성을 가진 아티스트도 거의 없기 때문에 이곳을 중심으로 무용예술인을 키우기 위한 ‘국내 무용 유학’ 프로그램도 진행해, 이 코스를 마친 젊은 예술인들이 극장과 지역의 네트워크 프로그램 강사나 스태프로 일하며 이 지역에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또한 현대무용에 본질적으로 쉽게 접근하자는 의도의 ‘쉬운 현대무용 클래스’도 지속적으로 열어 어린이나 발달장애를 가진 분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 재일조선인, 이민자, 장애인, 노인 등 지역을 구성하는 다양한 시민들과 연계하는 예술 프로젝트에 초점을 맞춰 시작한 것이 ‘곤니치와 공생사회 프로젝트’이다. 극장의 노력들이 소문이 나서인지, 베트남, 미얀마 등으로부터의 이주민과 젊은 예술인들이 자연스럽게 동네에 늘어났고, 그렇다면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해야 하니 극장의 지향이 ‘다양성’으로 옮겨왔고 프로그램 역시 극장 중심의 현대무용 공연 외에 극장 바깥의 다원적인 프로젝트들이 많이 늘어났다. 구청장과 구청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 관심을 갖고 지원하는 편이다.
코멘트
다음 날, 예정에 없던 일이지만, 댄스박스 프로듀서(무용 전공, 안무가 겸 예술강사)와 젊은 안무가(국내무용유학 프로그램 졸업생)가 고베시의 시설이자 공간인 ‘행복한 마을’에 운영하는 노인, 장애인 등의 소수자를 위한 유니버설칼리지에서 진행하는 무용 워크숍에 초대받았다. 참가자는 대부분 발달장애를 가진 청년들이었는데, 이들에게 ‘무용’의 정의, ‘컨템포러리’라는 혼란스러운 개념 따위는 필요 없었다. 낯선 방식으로 자기 몸을 움직여보고 서로를 관찰하고 소통하고 깔깔거리며 자유롭게 뛰고 웃을 수 있는 매개로서의 무용, 그리고 예술, 그 자체가 컨템포러리했다.





Mi-Mi-Bi Company, Open rehearsal


댄스박스 고베의 다양한 현대무용 워크숍에 참여했던 멤버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컴퍼니.



리서치
︎댄스박스 고베가 현대무용이라는 키워드로 펼치고 있는 다양한 지역 프로그램인 장애인과 함께 하는 무용클래스 ‘쉬운 현대무용클래스’, 국내무용유학 등에 참여했던 사람, 참여자에서 강사가 되었던 사람들이 모여 좀 더 심층적으로 무용을 공부하고 실천하고자 2022년, 컴퍼니를 만들었다.

︎미미비(Mi-Mi-Bi)는 농인, 맹인, 지체장애인, 비장애인, 수어통역사 등 다양한 형태의 신체와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어 스스로를 ‘믹스에이블 댄스컴퍼니’로 스스로를 설명한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 ‘공개연습’을 진행하는데, 이들의 활동, 무용, 장애무용 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이 단체의 이름 ‘미미비’는 ‘아직 본 적 없는 아름다움’(未だ見たことのない美しさ)에서 한자 未-見-美를 따 일본어 발음대로 읽은 것이다.

︎ 참관한 공개연습에서는 참여자 모두가 자신을 소개하는 방법으로서 자기만의 몸 풀기 방식을 선보였는데, 처음 참여하는 사람도 다른 사람이 가진 신체성, 언어, 감각, 소통의 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단계였다. 그리고는, 오늘 연습 리더를 맡은 한 명이 자신의 신체표현 방식을 공유하고, 이를 같이 시도해보는 과정으로 진행. 그리고 일 년 간 미미비로서의 활동방향과 내용을 공유하는 자리로 진행되었다.

︎미미비는 2022년 도요오카연극제 프린지 섹션에 초청되어 <아직 본 적 없는 아름다움-도요오카 버전>을 공연하고, 독일의 연극제 씨어터포멘(Festival Theaterformen)의 프로젝터 ‘A better world’의 프로그램 디렉션을 맡기도 했으며, 이들의 활동을 담은 다큐멘터리 <새로운 말>이 공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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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멘트
“거기에 가면 어떻게든 살 수 있는, 비와 바람을 피하는 처마 밑”(노키시타 홈페이지 중)






Cho, Hye-mi&Yokobori Fumi


조혜미는 고베시 신나가타구에서 한국 전통무용을 공연하고 가르치는 재일조선인 3세이며, 요코보리 후미는 댄스박스 고베의 프로그램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리서치
︎신나가타는 재일조선인들이 모여살기 이전부터 다른 문화가 섞여 있는 곳이었다. 오키나와의 아마미, 베트남 문화 등등. 주소는 다 같이 ‘신나가타’이지만 스파이스가 다르다고 할까. 그게 그냥 일상인데, 무관심이 아니라 관용이다. 보트피플로 처음 이곳에 정착한 베트남인들의 입을 타고 신나가타가 이민자가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난 것 같다. 베트남이나 미얀마 등으로부터의 이민자들이 살 곳을 상담 받으러 관공서에 가면 신나가타를 추천한다고 한다.

고베는 95년에 일어난 한신아와지대지진의 직격탄을 맞은 곳이다. 다른 곳들은 이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복구, 즉 재개발이 진행되었지만, 신나가타에는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을 그냥 두고 역사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목소리와 다 덮고 새롭게 개발하자는 목소리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기도 하다.

︎신나가타에 30대 대표가 운영하는 해피노인주간활동센터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다른 시설들과 다르게 다양한 혈통의 노인들을 마을의 역사를 간직한 사람들로서 잘 받아들이는 곳이다. 무기력한 치매노인으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과 어울리면서 일상을 다르게 만들어주는 곳. 치매에 걸렸을지언정 역사가 새겨져 잇는 몸과 감각을 존중하며 약물보다는 다양한 사람을 통해 활기를 주려는 곳. 저마다 피부색이 다른 동네 아이들이 오가는 곳이다. 신나가타다운 곳 같다.  

재일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고향의 집’ 같은 노인센터도 여럿 있다. 물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곳에도 들어갈 수 있지만, 고향의 집 같은 곳은 한국 혈통 특유의 흥이 넘치는 곳이다.  

대지진 복구 작업에 팔을 걷어붙였던 어르신들이 만든 빅파라다이스 합창단도 신나가타의 명물이다.


︎이런 신나가타에 댄스박스가 있다는 것만으로 서민들의 연대가 달라지고 예술에 대한 감각이 달라진다. 다 같이 모여 즐길 수 있는 구조를 잘 만드는 것 같다. 이 동네를 객관화한 위에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잘 초이스한다. 비예술인 시민들이 극장 스태프들에게 “수고가 많다”고 인사하는 분위기다. 예술이 뭔지, 창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아이들도 어른들이 진심으로 노는 모습을 보게 되고. 극장을 중심으로 동네의 많은 사람, 단체, 공간들이 연결되어 있다.

︎ 신나가타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주민들이 무대에 올라 각자의 출신지의 춤을 소개하는 <신나가타 댄스 사정>, 신나가타에 있는 여러 공적 공간(병원, 돌봄시설)이 비는 시간을 무용예술인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신나가타 댄스마피아>, 다국적 노래자랑 등등이 요코보리 프로듀서가 댄스박스를 거점으로 펼쳐온 프로젝트들이다.

특히, 베트남인 남성과 결혼해 아이를 낳은 요코보리는 베트남어-한국어-일본어의 자장가를 모아 그림책으로 엮기도 하고 집안 공간을 활용해 베트남 혈통의 아이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을 열기도 하고, 베트남인 어머니들과 함께 모임을 하기도 한다.
코멘트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요코보리는 자전거를 끌고 곁에서 걸으며 말한다. “이제 극장에서 소위 잘 만들어진 공연을 보는 데 아무 흥미를 못 느끼겠어. 극장 바깥이 재미있어”.



Kobe KoreaEducation&
Culture Center


神戸コリア教育文化センター. 재일조선인 3세인 김신용 대표가 만든 사설의 한국교육문화센터. 신나가타구에 카페를 겸한 커뮤니티 스페이스와 자료관을 운영하고 있다.
리서치
︎본인과 본인 자녀가 ‘자이니치’라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했다. 그 차별이 모순적이고 이상하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직접 하기로 했다. 자신이 학창시절 때 일본인 교사들은 차별적이어서 민족성이 자리잡지 못하기도 했고, 70년대 일본의 사회변혁운동의 분위기와 입국관리제도 개악 때문에 고등학생 때부터 거리에 나가 운동을 시작했다. 재일조선인은 변호사 시험을 치르고 합격할 수는 있어도 변호사 자격증은 받을 수 없다는 사실도 모르고 법학부에 진학해 모든 사실을 알게 됐다. 내 아이도 조선학교를 다녔는데 초등학생 때부터 차별발언을 들었다. 교육제도 자체도 차별적이어서 활동초기에는 일주일에 세 번씩 교육위원회를 찾아가 면담을 했다고 한다.

︎ 30년 전에 재일조선인 아이들을 위한 교육활동으로 시작해 4-5세에게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키워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해왔다. 2008-9년에 진행한 가족사진 모으는 사업이 커져서 2014년에 지금의 장소로 옮겨 법인화를 했다. 1층에서는 카페와 한글교실을 하고 2층을 사무실 겸 자료실로 쓰고 있다. 앞으로는 자료센터로 중점을 옮길 계획이라고. 가족사진 프로젝트를 통해 굉장히 귀중한 사진들이 모였다. 출판사로부터도 많은 제안이 잇었지만, 김신용 대표가 직접 자기 손으로 제대로 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주도해 진행하고 있고, 재일조선인들이 오히려 관심이 없고, 일본인 대학교수 등이 협력하고 있다. 협력하는 사람들의 연령도 50대
이상이다.

김신용 대표처럼 비영리-비정부단체로서 이러한 한국문화 관련 활동을 하는 센터는 도쿄, 오사카, 나고야, 교토 정도에만 있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시민활동을 하는 청년과 단체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젊은 재일조선인 청년들이 한국의 고향을 방문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고 싶다.

︎베트남인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요코보리는 일본이 다른 혈통을 가진 아이들에 대한 교육에 차별적이라는 실감을 한 것 같다. 한 반에 두세 명씩 베트남 혈통의 아이들이 있는데 베트남어를 가르치지 않는 학교, 베트남 출신 학부모가 면담할 수 없는 학교, 일본문화만을 주입하는 학교.... 재일조선인 커뮤니티인 신나가타에서 댄스박스 고베를 운영하며 느꼈던 이민이라는 이슈에 자기 경험이 더해지다보니, 김신용 대표의 지난 활동에 더 경의를 갖게 되었고, 같이 협력할 구실을 항상 찾고 있다고. “이런 걸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이미 다 김 대표님이 하셨더라고”

이 둘은 2023년 3월에 개최된 신나가타에 살고 있는 이민 가족들의 사진을 찍어 전시하는 <가족사진전>으로 협력했다.
코멘트
“(제도와 법적인 권리와 혜택이 부족한)마이너리티이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더 풍요로워야 한다.”(김신용 대표)



kyoto




Atelier Mitsushima


アトリエ光島. 전맹 미술작가 미츠시마 상의 공간. 오래된 2층짜리 목조건물의 1층에는 스튜디오 겸 극장과 사무실과 작업실, 2층은 다다미방 갤러리로 구성되어 있다.

리서치
︎ 맹학교에 다닐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고, 취미 삼아 하다가 공모전에서 입상한 것을 계기로 전문 미술인의 길로 들어섰다. 미술작가로서 한국에도 방문한 적이 있다. 생업은 침술사인데, 나이가 있어 현재는 침술보다는 예술에 더 전념하고 있는 편이라고. 전맹의 미술작가가 전 세계에 자기만 있진 않을 거라고 말하는 미츠시마 상이지만, 나에게는 또다른 세계가 열린 것 같다.

︎ 창작은 팀으로 진행한다. 현재 10년차 1인, 1년차 1인의 두 어시스턴트와 함께 작업을 하는데, 못 그림의 경우 팔레트(사진 참조)에서 도구를 고르고 말로 색깔이나 형태를 지정하는 방식이다. 입체적인 작업을 위해서 못이라는 소재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평면 작품의 경우 미츠시마 작가가 다양한 두께와 폭의 마스킹 테이프로 형태를 만들고, 어시스턴트에게 색깔이나 그라데이션 등을 말로 전달해 제작한다. 어시스턴트가 말하길 한번은 “달빛색으로 칠해 달라”는 디렉션이 있어 한참을 대화하고 고심한 적이 있었다고. ‘달빛색’ 정의에 대해 묻자, 약간은 보였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거나 애독하는 판타지 소설에서 글로 표현된 색깔로 인지하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작품 설명을 할 때의 스토리텔링이 너무 재미있어서 몰입해 듣게 만드는 화술의 소유자이다.)

︎ 아틀리에에서는 시각장애가 있는 분들을 위한 미술 워크숍을 진행한다. 이제는 제법 소문이 나서 매주 먼 곳에서 찾아오시는 분도 있다. 워크숍은 기본적으로 어떤 오브제를 만져서 그리거나 실제로 몸으로 감각해 그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시각장애인 부부가 만든 작품을 보았는데, 스누피 인형을 만져 그린 스누피, 교토대학을 실제로 걸어보고 제작한 캠퍼스 조감도였다. 일본에는 미술 관람 접근성에 있어서도 시각장애인 미술 관람 워크숍이 상당히 오래 전부터 시도되고 있다고 한다. ‘만지는 미술관’(触れる美術館)이라는 움직임이 한 방식인데 이는 작업을 만져서 감상하는 법, 그리고 정안인의 설명과 대화를 통해 시각장애인이 작품을 상상하고 떠올리는 대화감상법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미술 워크숍에 참여하는 시각장애인들도 처음에는 감상워크숍을 통해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가 직접 만드는 단계로 간 것이라고.

코멘트
“(제도와 법적인 권리와 혜택이 부족한)마이너리티이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더 풍요로워야 한다.”(김신용 대표)





Murakaya Takuya <Moonlight>


村川拓也. 교토를 거점으로 다큐멘터리 영상, 다큐멘터리 연극 창작 작업을 하는 연출가 무라카와 타쿠야의 작품. 2018년 말 초연된 작품이 코로나19 시대를 넘어 교토 롬씨어터에서 재공연 되었다.

리서치

︎신작 제작을 의뢰받은 시민회관을 리서치 하다가, 그곳에서 자주 열리는 피아노 연주회에 관심을 갖고 공연을 만들기로 하고, 피아노교습소를 찾아 다니며 리서치와 배우 찾기를 진행한다. 그러던 중 오로지 베토벤의 ‘월광’만을 연주하는 70대 남성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분은 전맹의 시각장애인이었다. 그가 무대 위에서 무라카와와 대화하며 피아노에 얽힌 기억, 연주를 선보이는 작품, 여기까지가 초연.

︎ 그런데, 내가 본 공연은 전혀 새로운 작품이었다. 초로의 피아니스트는 등장하지 않는다. 작년 삿포로 투어를 앞두고 세상을 떠난 주인공. 무라카와 연출은 이 작품 모두에 등장해 이 부고를 알리고 그의 ‘부재’를 드러내며 공연을 이어간다. 돌아가신 주인공을 대신하는 것은 그가 들고 다니던 화이트케인. 주인공은 부재하고, 무라카와의 질문에 대한 주인공의 답변은 생략되고, 주인공의 기억속 피아노곡들은 대리 연주된다.

누군가의 ‘부재’를 여러 번 공연이라는 형식 안에서 실험해온 무라카와 연출과 어울리는 작품이, 결론적으로는, 되어 있었다. 모든 답을 무라카와가 전해주지는 않아서 여러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했고, 주인공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지 나름대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었다. 중간중간 주인공의 어릴 적, 젊을 적 사진이 스크린에 투영된다. 허무한 삶. 마지막, 주인공이 그렇게 좋아하고 치고 싶어했던 베토벤의 월광교향곡. 이전 공연에서 주인공이 치다가 실패했던 버전의 오디오가 흘러나온다. 완전하지 않은 월광 교향곡. 구노의 아베마리아, 베토벤의 월광교향곡, 바이엘 교습... 실패로 끝난 그의 연주, 이미 종료해버린 그의 삶에 가슴이 미어져왔다. 보였다가 노후에 보이지 않게 된 삶... 어떤 상황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나이, 노화를 탓했다는 주인공.

︎ 무라카와 연출은 본인이 ‘장애’라는 이슈에 관심이 있다거나 ‘장애예술’ 연출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는 사람이지만, 반복해서 돌보는 몸과 돌봄을 당하는 몸, 부재하는 감각과 감각의 부재 등을 다루고 있는 신기한 연출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자기도 모르겠다고 한다.

코멘트



osaka





cocoroom


ココルーム. 오사카의 빈민가인 가마가사키(釜ヶ崎)에 자리한 카페+게스트하우스+플리마켓+예술학교이다. 이름 코코룸은 목소리(声, 코에)와 말(言葉, 코토바)과 마음(心, 코코로)의 방이라는 공간의 설명에서 유래한다. 대표는 여성시인인 우에다 카나요 상.

리서치
︎신칸센 신오사카역에 내려 지하철로 갈아타고 동물원앞 역 하차. 지도를 따라 걷다 보니 결코 깨끗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상점가 한 켠에 손으로 쓴 코코룸 간판이 보인다. 주변엔 “소변금지” “남자의 길” 그런 낙서들이 가득하고, 싼 가격에 술과 식사를 할 수 있는 가게들. 아직 저녁 전인데도 어쩐지 취기가 가득한 골목들.

게스트하우스 리셉션은 코코룸 카페이자 플리마켓이자 공용공간이다. 벽에는 빈틈없이 코코룸 행사 포스터, 알림장, 일정표 등이 붙어 있다. 널찍한 식당 뒤쪽으론 아기자기한 핸드메이드 소품들이 가득한 해가 잘 드는 정원, 2층부터 게스트룸, 주변이 다 내려다보이는 옥상도 있다.

︎코코룸은 이 부근에 사는 먹고 살기 팍팍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모이는 동네 커뮤니티 센터다. 이용자는 60대 이상의 남성들이 많다. 이들이 모여 밥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표현하니 예술이 생겼고, 시인인 대표의 시의 학교, 오가는 볼런티어들의 특기와 수요를 반영해 미술반, 양봉반, 합창반 등 다양한 교과목이 생겼다. 그리고 코코룸은 스스로를 ‘가마가사키예술대학’이라고 칭한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기에 대학이 있어야 한다”가 이 대학의 슬로건이다. 벽을 채우고 있는 붓글씨로 쓴 시, 그림들이 모두 이 대학의 수업결과물.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운 지역주민들을 위해 ‘동네보건실’도 연다.

︎ 저녁식사 시간. 넓은 식당에 숙박객, 동네에 사는 아저씨들, 견학 온 오사카대학 관련 외국인들 등 15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밥을 먹는다. 나는 쿠마짱과 마주앉았다. 치아는 별로 건강하지 않은 것 같지만, 눈웃음이 다정한 쿠마짱은 옛날에 10년간 센다이에 있는 호텔에서 일을 하다가 지금은 코코룸에서 5분도 안 걸리는 곳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한다. 쿠마짱은 하는 말마다 명언이었다. “코코룸에 오는 사람은 다 친구, 다 패밀리” “웃는 얼굴이 제일 중요” “기다릴 테니까 꼭 다시 와” “일본어를 그렇게 잘 하니 일본 여기저기 다니면서 한국과 관련된 일은 다 받아서 하렴” 너무너무 따뜻하게 웃는 법을 알고 계신 분이었다.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까, 지금 어떤 생활을 하는 걸까, 더 얘기하고 싶었다. 가끔 밥을 먹으러 오신다는데 오지 않는 날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지내고 계신 걸까. 서로 부디 건강하게 살아남아 다시 만날 수 있길.

오뎅과 닭볶음, 소세지야채볶음, 양배추샐러드, 계란말이 등, 모두가 나누어 먹을 수 있게 큰 그릇에 반찬을 담고 다 같이 나눠먹는다. 게스트의 식사비는 1천엔이니 싸지 않지만, 내가 천 엔을 내서 쿠마짱이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면 기꺼이 와서 돈을 내고 밥을 먹으리. 저녁 후에는 커피를 한잔씩 나눠 마셨고, 일을 돕겠다고 하자 일본답지 않게 역할이 주어졌다. 발달장애가 있는 이시카와 군과 나란히 서서 산더미 같은 설거지가 끝난 그릇들의 물기를 제거하는 작업을 했다. 이시카와 군은 낮에는 주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가방에는 인형이 가득하고, 인형들의 이야기를 주변사람들에게 들려준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문재인 대통령의 안부를 묻는다. 코코룸 앞에 판을 벌인 중고시장이 단지 멋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을 아주 싼 가격으로 구입해 쓸 수 있도록 한 설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 날 아침, 커피를 한잔 주문해 마시고, 라디오체조를 기다린다. 동네 아저씨도 오셨고, 여기에서 오래 묵고 있는 듯한 외국인도 있다. 어제와는 다른 두 명의 스태프. 정원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우물가에 코코룸만의 불단, 여기저기 누군가에 의해 이곳에 오고 수집된 물건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10시가 넘어 코코룸의 매일 아침 루틴인 라디오체조 시작. 3절까지 체조를 함께 마치고 조회시간. 서로의 안부를 공유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작별 인사를 한 후 역으로. “금방 또 만나게 될 것 같아요” “다녀오세요”라는 인사말은 언제 들어도 마음이 따뜻하다. 모두들 좋은 하루, 좋은 한해 되세요.

코멘트






Kim Manri, Theater Company TAIHEN


金滿里, 劇団態変. 지체장애인만이 할 수 있는 신체표현을 탐구하는 극단으로 재일교포 3세인 김만리 씨에 의해 1983년에 오사카를 거점으로 창단, 지금까지 일본 국내외에서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치고 있다.

리서치
︎2018년 요코하마공연예술회의에서 오랫동안 소문으로만 들어왔던 극단 타이헨의 공연을 눈앞에서 처음으로 봤다. 어떠한 보장구도 쓰지 않고, 몸의 실루엣과 형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레오타드를 입은 지체장애인 배우들이 도시락 속 반찬이 되어 ‘탈시설’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었다. 그때의 시각적, 정신적 임팩트는 지금도 생생하다.

︎극단을 이끌고 쓰고 연출하고 출연하는 김만리 대표는 연극인이기에 앞서 장애인운동가이기도 하다. 일본의 대표적인 장애인운동 조직인 푸른잔디회에도 참여했고, 지금 서울에서 진행형인 지하철 탑승 투쟁 같은 버스탑승 투쟁에도 가담해왔다. 연극이나 무용을 전문으로 배우기보다는 분노를 갖고 단전을 울리는 것이 자신의 연극의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특히, 하체에 무게중심을 두는 훈련은 한국의 전통무용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이 전통성이 없는 일본인 배우에게 훈련시키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라고. 이러한 요소는 극단 타이헨의 표현을 머리로 하는 표현이 아닌 몸으로 하는 표현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 그리고 극단 타이헨의 장애인 연극은 운동과 궤를 같이 한다.

︎장애인이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살고 싶은지에 대해 최소한의 의지표명을 하는 것이 필요하고, 자립을 위해서는 혈연으로부터의 결별과 지역 네트워크 구축이 전제되어야 한다. 부모-가족-혈연주의로 상징되는 정상성 가치의 추구를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만드는 근본 원인으로 본다. 이는 비단 장애인뿐 아니라 부모의 조건에 따라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받는 현재의 젊은 세대에게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정신적으로 부모와 결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최근에 장애와 관련된 예술활동이 늘어난 것은 피부로 느낀다. 그러나 이를 뜯어보면 비장애인의 장애관련 활동이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비장애인의 힐링에 활용되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있다.

정책과 공적 지원에는 여전히 미추에 대한 구분, 우생사상이 기저에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극단을 운영하는 것은 일종의 자립생활이다. 장애인 집단 거주시설에 사는 사람들을 발굴해 연기지도를 하고 나와서 극단 생활을 하게 한다. 물론 경제적인 보상을 해줄 수는 없지만, 각자 생활보호, 장애인작업장 근무 등의 방식으로 자립생활을 영위한다.

︎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전통무용을 연기의 기본으로 삼고 어머니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고 있지만, 한국에서 공연을 한 번밖에 못해봤다.

코멘트
“비장애인인 당신이 장애인과의 작업 과정에서 생기는 보이지 않는 위계가 신경 쓰인다면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해라, 그리고 상대에게 솔직히 물어라.”(김만리)


okayama




Sugawara Naoki


菅原直樹, 요양보호사, 극단 오이보케시(OiBokkeShi, 老惚死(늙음-치매(속어 그대로 표기)-죽음)의 대표이자 작/연출자.

리서치
︎도쿄에서 극단 세이넨단(青年団) 배우로 활동하다가 구직지원기관인 할로우워크에서 2개월간 요양보호사 자격을 공부하고 노인주간활동센터에서 일을 했었다. 이 일이 나에게 맞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현장에 실습을 나가보니 노인들과의 교류가 즐거웠다.

︎ 돌봄현장에서 일할 때 돌봄 전문가인 미요시 하루키 씨의 책을 읽었다. 돌봄 현장의 즐거움이 언어화 되어 있고 그것이 철학이나 현대사와 연결된다는 내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분의 세미나에도 참가했는데 “돌봄은 예술이고 의료는 과학, 의료는 사람의 몸과 마주하지만 예술은 사람의 인생과 마주한다”는 말을 들었다. 돌봄은 개개인의 특성을 이해하고 수행해야 하고, 이를 계기로 상대는 살아볼 의지를 가질 수도 있다. 돌봄에는 상대의 인생을 보고 그의 역할을 발견해주고 못하던 것에 시도해보게 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또한 돌봄도 예술도 사람을 마주하고 효율성과 수치로 판단해서는 안되는 영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세미나에서 새로운 돌봄의 방식을 고민하는 분들과 만났고, 나의 경우 내가 했던 연극과 연결시키게 되었다.

︎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간토 이북지역에서 이주자가 가장 많이 유입된 도시가 오카야마였다. 내가 소속된 극단의 예술감독인 히라타 오리자 씨가 오카야마시 어느 마을의 문화마을조성사업 같은 것을 맡게 되고 거기서 일을 하게 되어 이주를 결정했고, 문화쪽 일과 돌봄일을 같이 하다가 다른 기회가 생겨 현재의 마을에 정착했다.  

오카야마에서 노인을 대상으로 한 연극워크숍을 했을 때 참여했던 분이 당시 이미 여든이었던 오카다 씨(애칭 오카지)였다. 워낙 배우의 꿈이 있어서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경험도 있었고 그걸 인생의 자랑으로 생각하던 분이었다. 연극 같이 하자고 하니 흔쾌히 하겠다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내가 대본을 잘 써서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는데, 서너 작품 만들고 나니 오카지 대사 암기 못하고, 자기 역할 까먹고, 연출은 화나고... 그런데, 완성도 높은 작품이 아니라 모인 사람들의 장점을 잘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아흔이 된 오카지가 실수를 해도 성립하는 연극을 만들고 있다.

︎ 오카지가 주인공인 연극을 내가 만들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오카지의 열정과 언어에 의지해 연극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2023년 1월에 오카지가 오랫동안 돌봐온 인지증의 아내분이 돌아가셨다. 오카지의 상실감이 회복이 안 될까봐 걱정했는데 “나에게는 목표가 있다, 공연이 정해져 있으니 꼭 할 거다. 죽어도 갈 거다, 가게 해 달라” 하신다. 나의 상상을 넘어서는 분이다. 올해만 해도 공공극장의 초청으로 세 편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지금에 충실할 생각이다. 연세가 있으시니 슬픈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신작으로는 오카지가 살아있는 동안 열리는 생전 장례식을 만들 예정이다. 혹여 언젠가 오카지가 돌아가셔도 공연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 생각이다.

︎ 지금 살고 있는 나기초라는 곳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모아 연극을 한다. 다들 연극 경험이 없거나 관심이 없었지만, 동네에서 연극 워크숍을 계속 하다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오면 다 단원이 된다. 장애가 있는 청년, 인지증이신 노인, 돌봄노동을 하는 어른 등 오기만 하면 모두 배우로 무대에 설 수 있다. 이전에 익숙했던 연극의 방식으로는 그들의 언어와 이야기를 담을 수 없어 새로운 연극을 고민한다. 돌봄에 대해 알고 경험한 사람으로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있다.

코멘트
“연극과 복지는 정말 궁합이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공감, 관계, 동행... 연극을 통해 그 가치들을 전달하고 싶다. 참여자들은 연극을 통해 자기가 있을 수 있는 곳, 있어도 되는 곳, 마음이 편한 곳을 발견할 것이고, 연극이 설령 픽션이라도 그 사람의 진실은 그 순간에 나타날 수도 있다고 믿는다.”


nara





Tanpopo-No-Ye


たんぽぽの家. 민들레의 집이라는 의미. 1980년에 나라현 나라시에 문을 연 장애인복지시설이다. 인터뷰이는 오카베 타로 상무.

리서치
︎ 설립자이자 현재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하리마 야스오 씨는 마이니치신문 기자로 여러 지역에 부임하여 취재기자 활동을 하다가 나라 지국 근무 당시 단포포노이에를 만들려고 준비 중이던 장애인 부모님 모임과 우연히 만나게 됐다. 원래 복지보다는 문화예술에 관심이 갖고 있었는데 장애인들의 자기표현 활동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장애는 개인과 가족의 책임이라는 풍조였지만, 하리마는 장애는 사회가 규정하는 것이니 사회를 바꿔야 하고,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단포포노이에를 맡으며 창립 당시부터 장애인 복지와 예술의 결합을 내세웠다.

︎ 단포포노이에라고 통칭하는 조직 안에는 크게 세 가지 조직이 있는데, 사회복지법인 와타보시노카이가 장애인들이 통원하며 일상적으로 예술활동을 하는 곳으로 그 창작과 발표의 거점이 되는 아트센터 하나(2004년 개관), 이 활동을 장애인의 일로 연결시키는 굿잡센터도 이 법인에 속한다. 사단법인 단포포노이에는 단포포노이에 바깥의 사회와 협력하며 장애인예술프로젝트를 펼치는 곳, 나라단포포노카이는 단포포노이에를 위해 활동하는 시민자원활동가 단체이다.

와타보시노카이에 통원하는 장애인은 약 60명으로 연령대는 10대 후반부터 60대까지 폭이 넓다. 이 중에 일부는 생활보호 대상자로 이들 활동에 대한 급여는 단포포노이에가 직접 지급하며, 만든 작품이 팔릴 경우에는 인센티브를 지급한다. 취로계속지원 대상자는 일로써 통원하는 경우로, 수입액의 제한은 없다. 취로계속지원은 A형과 B형으로 나뉘는데(국가 기준), A형은 굿잡센터에서 최저임금 이상을 받으며 근무하고 중증 장애에 해당하는 B형의 경우 아트센터 하나에서 창작 작업을 한다.

굿잡센터의 경우 무인양품 등의 기업의 의뢰를 받아 장애인들의 미술 작품을 디자인화하고 상품화하는 일을 한다. 발달-정신장애 중 경증의 장애인들이 주로 여기에 소속되어 일한다. 단포포노이에가 영업을 하기도 하지만, 기업들이나 디자이너들이 먼저 협력을 제안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돌봄형 집합주택도 부지 안에 있다. 건축 과정에서부터 장애인들의 니즈를 반영해 입주 장애인들은 모두 개별룸에서 생활하고 24시간 돌봄이 제공되며, 거주 기간은 20년이다. 낮에는 옆 건물에서 일하고 이곳으로 퇴근하는 형태다. 탈시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중증장애인들에게 선택지가 늘어난 셈이라고 할 수 있다고.

︎ 단포포노이에가 40년이 넘었으니 이 근방에서 제일 오래된 거주자인 셈이다. 10년 전까지 숲이었던 곳이 개발되어 연립주택이 들어섰는데, 복지시설을 근거로 이사해온 사람들이어서 호의적이며 이웃 고등학교의 지역교류학과와 자원활동을 통해 교류하기도 했다.

︎ 장애인들의 쇄도는 의외로 없다. 여기에 오는 사람들은 지역의 특수학교 취직처로 오는 경우가 많다. 이곳처럼 자유로운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아트센터 하나에 다니는 장애인이 처음에는 30명이었고, 현재는 60명 정도이다. 그 중 정말 ‘예술’을 하고 싶다고 하며 온 사람은 단 2명. 하다가도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자리로 옮겨준다.

︎ 디자인이나 미술은 여러 루트를 통해 상품화가 가능한데, 공연예술은 일이 아니라 여가영역에 포함되었었다. 그런데 최근에 공연이나 워크숍 의뢰가 늘어나면서 ‘일’로써 성립되고 있다.

예술은 열심히 한다고 잘 하게 되는 영역이 아니다. 30초 만에 그린 작품은 팔리는데, 30일 그린 자기 그림이 팔리지 않는 것을 보고 더 잘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는 것은 좋은 자극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판매 여부가 평가기준은 아니다. 완성품보다는 프로세스를 제대로 봐주고자 한다. 그래서 매일의 창작과정을 기록한다. 팔리지 않아도 충실한 일상을 보낼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의 행복을 어떻게 담보할까, 그리고 아틀리에로서 좋은 작품을 어떻게 만들까를 늘 고민하지만 압박감 없이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코멘트
“(제도와 법적인 권리와 혜택이 부족한)마이너리티이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더 풍요로워야 한다.”(김신용 대표)